‘유배의 섬’ 흑산도, 실제론 고대 글로벌 교역지였다

2023-06-26

노형석의 시사 문화재
흑산도 고려 절터 발굴 현장
금동불상 발 조각·상감청자
1244년 뜻 명문 기와 눈길


절터 가장 자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의 발 조각. 노형석 기
절터 가장 자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의 발 조각. 노형석 기


전남 목포에서 서쪽으로 뱃길 따라 2시간이면 가는 서해의 큰 섬 흑산도. 이 섬에 대해 상당수 한국인들은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몇가지 열쇳말을 갖고 있다. 삭혀서 톡 쏘는 맛을 내는 홍어 요리의 본향이란 사실과 이준익 감독이 수년전 연출한 영화 <자산어보>의 영화 속 저술을 지은 19세기 선비 지식인 정약전(정약용의 형)의 유배지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다. 나이 든 이들이라면 가수 이미자의 국민 히트곡이었던 <흑산도 아가씨>도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사이 국내 고고역사학계에서는 오늘날 이런 흑산도 인식이 지극히 피상적이고 왜곡돼 있다는 사실을 발굴조사를 통해 속속 밝혀내고 있다. 역사 속 흑산도는 신라인과 고려인의 시대부터 동아시아 한·중·일 교역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상과 의미를 지녔던 교역 거점이었고 이를 입증하는 숱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는 중이다.



한반도의 우리 조상들뿐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무역대표부나 영사관 격의 공관 시설을 설치해 무시로 드나들며 장사와 불교 등의 포교 신앙 활동 등을 벌였다는 여러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무심사터의 핵심인 금당 추정 유적 위에 자리한 팽나무와 그 아래 고려시대 석탑과 석등의 모습. 탑과 석등은 절터 다른 곳에 있다가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주민들이 심은 것으로 전하는 수령 300년된 팽나무 뿌리가 탑의 일부 부재와 기단부를 휘감은 독특한 풍경도 볼 수 있다.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고목이어서 연구소 쪽은 고심 끝에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둘레 권역만 조사하기로 했다. 노형석 기자
무심사터의 핵심인 금당 추정 유적 위에 자리한 팽나무와 그 아래 고려시대 석탑과 석등의 모습. 탑과 석등은 절터 다른 곳에 있다가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주민들이 심은 것으로 전하는 수령 300년된 팽나무 뿌리가 탑의 일부 부재와 기단부를 휘감은 독특한 풍경도 볼 수 있다.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고목이어서 연구소 쪽은 고심 끝에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둘레 권역만 조사하기로 했다. 노형석 기자


지난 14일 오전 흑산도 북동쪽 영역인 성라산 동쪽 협곡 기슭에 자리한 옛 무심사 절터에서 열린 불교문화재연구소의 발굴유적 설명회 현장에서 그 실체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론 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 721번지에 자리한 이 유적은 팽나무 고목 아래 놓인 12~13세기 고려시대 절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8기 이상의 옛 절집 건물터가 축대 터와 함께 펼쳐지면서 동쪽 해변가로 시선이 향하는 인상ㄴ적인 경관을 지니고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섬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토기와 기와들이었다. 신라인들의 생활 유물인 점무늬를 찍은 인화문 토기조각과 주름 무늬 토기조각들을 필두로, 절터 영역의 가장자리에 참호 모양으로 구덩이를 파서 조사하다 나온 금동불상의 발가락 조각과 ‘中元甲辰年六月造(중원갑진년유월조)’이란 글자가 새김(1244년)된 귀신 눈알 모양 무늬(귀목문)가 붙은 막새편, 상감청자 등의 고려 유물들, 송대의 중국제 도자기편 등이 줄줄이 늘어놓아져 있었다.



놀라운 건 ‘中元甲辰年..’ 명문이 새김된 고려시대의 귀목문 막새 기왓조각이었다. 뭍에서도 한참 내륙인 광주 운남동 고려가마터에서 만든 것과 모양새가 똑같고 명문도 똑같기 때문이다. 1244년을 뜻하는 명문 시기는 삼별초 부대가 편성되고 고려왕조가 막바지 대몽항쟁을 치르고 있을 시기였다. 14세기 고려말기의 퇴화되는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감청자 그릇도 2점이나 완형으로 나왔다.



절터 발굴현장에서 나온 건물 계단의 대형 소맷돌. 노형석 기자
절터 발굴현장에서 나온 건물 계단의 대형 소맷돌. 노형석 기자


무심사는 절을 세운 연대와 사라진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유적의 양상으로 미뤄 고려시대 번성하다 고려왕조의 끝물에 왜구의 준동으로 섬이 비면서 폐사된 것으로 생각해왔다. 터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남아있으며 1999년 부근을 처음 조사한 목포대 조사단이 지표조사를 벌이면서 ‘无心寺禪院(무심사선원)’이라고 새김된 기와 조각을 처음 확인한 것이 단서가 됐다. 이후 지역발굴기관과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5차례 이상의 발굴조사가 진행돼 왔다. 지난 2021년부터 진행된 연구소 조사에서 가장 큰 성과는 통일신라 금당 터를 고려 중기 건물 터 아래에서 처음 확인됐는 점. 14일 공개된 인화문 토기편 들이 유적이 발견된 언저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양상을 보면, 당연히 9~10세기 완도 청해진에 본거지를 두고 서해와 남해의 해상 교역 활동을 주도했던 장보고 세력의 자취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유적이 고려시대 흥성했던 절터의 아래쪽 지층에서 나왔다는 점과 절터의 아래쪽 읍동마을 쪽에서 7~8년 전 발굴된 큰 규모의 고려시대 관사터 유적이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이 절터가 관사 터와 연계된 글로벌 교역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을까란 추정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무심사터 발굴현장. 팽나무 아래 석탑과 석등 옆으로 축대를 쌓고 단을 지어 조성한 금당 추정터와 다른 딸림 건물터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무심사터 발굴현장. 팽나무 아래 석탑과 석등 옆으로 축대를 쌓고 단을 지어 조성한 금당 추정터와 다른 딸림 건물터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흑산도는 이미 고대와 중세시기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주목하고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중국 문인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관사와 봉수대의 존재가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무심사 터 주변 상라산성, 제사 터, 관사 터 발굴조사에서 중국제 동전과 도자기가 다수 나온 점 등을 감안하더라도 통일신라~고려시대 동아시아 남방항로의 해상무역 거점항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로 굳어지고 있다.


절터 유적 곳곳을 돌아보는 여정은 고즈넉하고 싱그러웠다. 눈부신 초여름 햇살 속에서 새들이 밝게 지저귀는 청아한 소리들이 사역 곳곳에 울려 퍼졌다. 유적 동쪽으로는 대나무 숲을 베어 읍동마을의 포구와 옛적 작은 감옥이 있었다는 옥섬이 푸른 연해를 배경으로 들어왔다. 700여년 전 흑산도 포구로 멀리 중국에서 사신을 실은 배나 교역선이 들어올 때 이들은 절의 불탑과 석등의 불빛을 보며 말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유배의 섬으로만 인식되어온 흑산도의 과거 찬란하고 속 깊은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를 이제 본격적으로 복권시킬 때가 되었다.



지난 14일 오전 무심사터 발굴현장 설명회 현장. 조사단과 전문가들이 통일신라 토기와 고려 막새기와, 상감청자 그릇 등의 출토품들을 검토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지난 14일 오전 무심사터 발굴현장 설명회 현장. 조사단과 전문가들이 통일신라 토기와 고려 막새기와, 상감청자 그릇 등의 출토품들을 검토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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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元甲辰年六月造(중원갑진년유월조)’이란 한문글자가 새김된 귀신 눈알 모양 무늬(귀목문)가 붙은 막새편. ‘중원갑진년(1244년) 6월에 만들었다’는 뜻의 연대 표기로 절터 유적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최초의 유물이다. 노형석 기자
‘中元甲辰年六月造(중원갑진년유월조)’이란 한문글자가 새김된 귀신 눈알 모양 무늬(귀목문)가 붙은 막새편. ‘중원갑진년(1244년) 6월에 만들었다’는 뜻의 연대 표기로 절터 유적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최초의 유물이다. 노형석 기자


절터 유적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의 점 무늬(인화문) 토기 조각. 노형석 기자
절터 유적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의 점 무늬(인화문) 토기 조각. 노형석 기자


흑산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969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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